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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대한의원 부속의학교 약학과와 근대약학의 도입

우리나라 근대 약학교육의 도입시점(導入時點)을 언제로 볼 것인가에 관해서는 몇가지 이론(異論)이 있다. 우선은 대한제국 고종황제 시절 “의정부 (議政府)” 직할 관립 병원인 “대한의원 (大韓醫院)” 의 부속의학교 (의학과, 약학과, 산파과, 간호부과 설치)의 약학과에서 약제사를 양성하기로 관제 (官制)를 개정한 1910년 2월 7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이 학교의 약학과는 3년제로 정원이 10명이었고 교육비 전액을 관비 (官費)로 지원하며 졸업시에는 약학진사 (藥學進士) 학위를 수여할 예정이었으나 1910년 한일병합 (韓日倂合)에 의해 실질적인 탄생이 무산되었다. 따라서 이 학교를 근대약학의 도입시점으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인다.

○ 일제시대 약학교육

가장 많은 지지를 받고 있는 주장은 “조선약학강습소” 설립 (1915년 4월)을 근대 약학 도입시점으로 보자는 견해이다. 이 강습소는 일제의 조선총독부가 인가한 1년제 야학제(夜學制) 교육기관으로 주로 일본에서 면허를 받은 저명한 일본인 약제사들이 조선의 약업자들에게 약품취급법, 약사법규, 약품시험법(藥品試驗法), 일본약국방(日本藥局方), 물리학, 화학, 약용식물학(藥用植物學), 한약(漢藥) 등을 교육하였다. 이 강습소는 총 2회에 걸쳐 30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는데 졸업생들은 약종상(藥種商) 허가를 우선적으로 받을 수 있었다.

1918년 2년제의 “조선약학교”가 창립되면서 조선약학강습소는 발전적으로 해체되었다. 조선약학교는 100명의 신입생을 선발하였으며, 처음에는 종로6가의 30평 기와집에 있다가 1919년 을지로6가의 새 교사(校舍, 목조건물)로 이전하였다. 이 터는 전에 구한말 훈련원(訓練院, 구 한국군 연병장) 자리였다고 한다. 이 자리는 우리나라 근대 약학의 발상지 (發祥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동창회는 1991년 9월 12일 이 자리에 교적비 (校蹟碑 )를 건립하였다. 이 교적비의 비문은 다음과 같다. 
“이 자리는 1918년 이래 수많은 약학의 영제들을 배출하여 국민보건 향상에 기여한 한국약학교육의 발상지로서 조선약학교, 경성약학전문학교, 서울약학대학을 거쳐 국립서울대학교약학대학으로 발전하였던 유서깊은 상아탑이 자리했던 유지(遺址)임을 길이 전하고자 동문의 뜻을 모아 이 비를 세웁니다. 1991년 9월 12일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동창회장 한명승”

이 교사는 조선약학교, 경성약학전문학교, 서울약학대학을 거쳐 국립서울대학교약학대학 시절까지 사용되었으나 1959년 서울대학교 캠퍼스 정리계획에 따라 서울대음대에 물려주게 되었다. 서울대 17회 졸업생들이 마지막으로 이 교사에서 공부하다가 연건동 캠퍼스 약대 건물로 이사하였다.
이 조선약학교에서는 이론과목으로 물리, 화학, 생물, 약용식물, 위생학, 약제학을, 실습과목으로 제약, 조제, 정량분석, 성분분석, 약물감정(藥物鑑定) 등을 교육하였으며 자랑할만 한 것으로는 새로운 면모의 분석, 생약, 조제전문실습실이 있었다. 1920년 5월 1일 조선약학교는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는데 한국인 졸업생은 이호벽, 신경휴 등 10명(모두 남자)에 불과하였다. 이는 1919년 3ㆍ1 운동 등으로 한국인 학생들이 줄어들고 학교도 일본인들에 의해 독단적으로 운영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1920년 11월 조선총독부가 실시한 약사시험에서 응시자 30명 중 11명만이 합격하였는데, 그중 한국인은 이호벽[李浩壁; 국산(國産) 약사 제1호], 신경휴[申敬休; 국산(國産) 약사 제2호] 2명뿐이었으나 이들이 각각 1, 2위로 합격하여 한국인의 명석함을 인정받는 동시에 한국인의 긍지를 높였다고 한다. 조선약학교는 1920년 제1회 졸업생부터 1926년 제7회, 그리고 朝本, 朝修의 이름으로 1932년까지 총 148명의 한국인 졸업생을 배출하였는데, 이 중 여자는 단지 17명에 불과하였다(서울약대 동창회 명부상의 숫자임).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약학졸업생은 1924년 제5회로 조선약학교를 졸업한 김순복, 김려운, 차순석, 홍택수의 4명이었다. “서울약대동창회명부”를 보면 조선약학교는 특별과, 본과, 수업생 등 다양한 형태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조선약학교가 “경성약학전문학교(3년제, 이하 경성약전)”로 승격된 연도는 “약사산고”, “서울대약대동창회보” 제2호(1984년, 한구동, 나의 학창시절) 및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요람”에 1930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경성약전의 제1회 졸업생이 배출된 연도는 1931년 3월이라고 생각된다. 아마 1930년에 조선약학교가 경성약전으로 승격되었지만, 이미 1928년에 조선약학교에 입학한 학생들이 2년 후인 1930년에 조선약학교를 졸업하지 않고 1년더 공부하여 3년을 수료하면서, 1931년에 경성약전 제1회 졸업생이 배출된 것 같다. 즉, 3년제 경성약전으로 승격한 것은 1930년이지만 실질적으로 3년간 수학한 졸업생이 배출되기 시작한 것은 1931년부터라고 볼 때, 1928년을 실질적인 약학교육3년제의 시발연도로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이 즈음 목조건물 대신 같은 장소인 을지로 6가에 붉은 벽돌 2층 건물을 신축하였는데, 이는 교장인 일본인이 와까모토라는 거상(巨商)의 백지수표를 기부받아 건축한 것이었다. 받은 돈은 건물을 짓고도 남아 남은 돈으로 동경의 마루젠 서점에 가서 미국화학회지 등의 문헌을 구입하여 학교에 비치하였다고 한다. 이 책들은 1975년 8월 국립서울대약대가 연건동 캠퍼스에서 관악 캠퍼스에 합류하면서 본부 중앙도서관에 이관하여 현재까지 보관하고 있다. 경성약전은 위 사진과 같은 모표를 사용하였는데 이 모표는 훗날 사립서울약학대학 시절까지도 그대로 사용되었다. 경성약전은 승격되면서 남학생만의 입학을 허용하였다. 따라서 1931년 3월 28일 제1회 졸업생 17명으로부터 1947년 7월 10일 제17회 졸업생 60명까지 총 499명(상기 약사산고)의 한국인 졸업생 모두가 남자였다. 고 우종학 서울대 약대 교수의 기록(나의 학창시절, “서울대학교약학대학동창회보” 제10호(1986년)를 보면, 1933년 당시 이 전문학교 한 학년의 학생 수는 120여 명이었으나 이 중 한국인은 20명 정도에 불과하였고 교수진도 대부분 일본인이었다. 이로부터 이 학교는 사실상 일본인을 위한 학교라고 할 수 있었다. 고 채동규 서울대 약대 교수의 기록(나의 학창시절, 상기 “동창회보” 제11호(1986년)를 보면, 1938년 3월에 졸업한 제8회 졸업생은 총 120명이었으나 한국인은 26명에 불과하였다. 1941년에는 일본인 40명, 한국인은 32명이 졸업하였다. 경성약전 제12회 졸업은 원래 1942년 3월에 하게 되어 있었으나, 일제가 2차대전에서 상실한 인명의 손실을 보충하기 위해 1941년에 들어서서 대학 및 전문학교의 졸업을 3개월 앞당김에 따라 1941년 12월에 졸업을 하는 일도 벌어졌다(김상민, 나의 학창 시절, 상기 “동창회보” 제14호, 1986년). 이 전문학교가 1930년 일본 문부성(文部省)의 지정을 받아 1933년부터 1944년까지 12회에 걸쳐 배출한 졸업생은 물론, 1930년 조선약학교 3년 이수자로부터 1932년 제2회 전문학교 졸업생도(그러므로 총 15회에 걸친 졸업생이) 국내에서만 통용되는 면허가 아닌, 일제의 지배하에 있는 전 지역에서 통용되는 일본 내무성(內務省)의 약제사 면허를 받을 수 있게 된 것 같다. 조선약학교(148명)와 경성약전(499명)을 졸업한 한국인 학생 총수는 647명이었다.

광복의 혼란 중에서도 1945년 9월 경성약전을 “사립(私立)서울약학대학(이하 사립서울약대)”으로 개명하고 동년 10월 초에 개강하여 약학대학 중 가장 먼저 정상 수업을 개시하였다. 사립서울약대는 신탁통치 찬반과 한국전쟁으로 심각한 운영난을 겪었다. 사립서울약대의 학제는 여전히 전문부 3년제였다가 1948년에 처음으로 전문부와 학부로 개편되어 희망자는 1년을 더 수학하여 총 4년을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1948년 8월 우리나라 정부가 수립됨에 따라 비로소 경제안정화와 점진적 산업재건 등의 당면과제들이 심도 있게 추진되기 시작하였다. 사립서울약대 전문부(3년제)는 1948년 6월 제1회(92명), 1949년 2월 제2회(97명), 1949년 7월 제3회(94명), 1950년 5월 제4회(110명) 졸업생을 배출한 것으로 그 존재를 마감하였다. 한편 사립서울약대의 학부(즉 4년제)는 1950년 3월 제1회(11명), 1950년 5월 제2회(11명)의 졸업생을 낸 것이 시작이자 마지막이었다.

 

1950년 9ㆍ28수복 후 문교부(文敎部)는 사립서울약대를 4년제 “국립서울대학교 약학대학”에 편입시켰다(9월 3일 각의 결정). 수복되었다고는 하나 아직 정부는 부산에 있었고 약학대학도 아직 부산의 가교사 (아래 사진)를 사용하고 있었으므로 실은 부산 피난 시절에 서울대학교로 편입된 것이다. 그래서 1951년 9월 29일 졸업생(18명)부터 국립서울대학교 약학대학 졸업생(제5회)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사립서울약대가 4년제 졸업생을 처음 낸 것은 1950년(3월과 5월)이므로 이로부터 4년을 빼면 1946년에 4년제가 도입된 셈이다. 그러나 1946년 당시에는 4년제라는 제도가 정식으로는 없었던 것 같다. 즉 당시에 3년제 전문부로 입학했던 학생 중에 일부가 1948년에 추가로 생긴 학부(4년제)로 옮겨 1년을 더 공부(총 4년)하고 졸업한 해가 1950년이 아닌가 한다.

1950년부터 사립서울약대가 국립서울대학교에 편입되면서 전문부는 자연히 없어지게 되었고, 약학교육은 4년제로 확실한 자리를 잡게 된 것으로 보인다.국립서울대학교 약학대학은 1953년 9월부터는 을지로 6가에 있던 교사로 복귀하여 약학교육을 재건하기 시작하였다. 1959년 5월 종로구 연건동에 있던 음대 교사와 교사를 교환(이전은 8월)하여, 1975년 7월 말까지 16년간 연건동 교사를 사용하다가, 1975년 8월부터 관악산에 있는 서울대 종합캠퍼스에 합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75년 관악 캠퍼스로 이사 온 이래 서울약대는 21동, 29동, 141동 (동물실험연구동), 142 동 (제약실습동) 및 부속약초원 (경기도 고양시 소재) 등을 보금자리로 교육과 연구의 충실화를 기해 왔다. 2001년에는 연건동 소재 “천연물과학연구소”와 합병하게 됨에 따라 대학본부로부터 20동을 추가로 배정 받아 2008년 2월에 천연물과학연구소를 관악캠퍼스로 이전하였다. 또 2009년부터는 약학대학 4년제 시대의 막이 내리고 소위 2+4년제라는 6년제 약학교육이 시작되게 되었다. 수업연한 연장은 1960년 이래의 약계의 숙원이었다. 40여년의 우여곡절을 거쳐 실시하게 된 6년제 하에서 우리대학은 새로운 교육 패러다임을 리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처해 있다. 우리대학의 리더십은 우리대학의 운명만을 결정짓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구한 역사의 흐름 속에 옷깃을 여미는 엄숙함과 진지함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 할 것이다.

-2007년 12월 심창구 (심창구 외, 한국약학사, 약학회지, 51, 361-382, 2007에서 발췌 정리)  [논문원본 PDF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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